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틀로프 베르거 (문단 편집) == [[슈츠슈타펠|친위대]] 행적 == 1936년 1월 30일에 [[하인리히 힘러]]와 [[한스-아돌프 프뤼츠만]]에게 초빙되어 친위대 상급대령으로 친위대에 들어간 베르거는 남서지구 친위대 상급지구 체육교관장으로 일했다. 1938년 8월부터 1940년 4월에 걸쳐 친위대 전국지도자 개인참모부의 스포츠 훈련부의 책임자가 되어 힘러의 측근으로 일했다. 또 겸하여 1938년부터 1940년에 걸쳐 친위대 본부에서도 일하면서 친위대원의 인원수 확보에도 열중했다. 베르거는 [[징병제]]를 실시한 [[독일 국방군]]과 절충하면서 친위대원의 인재확보에 힘써 [[히틀러 유겐트]]의 단원들을 포섭하고 외국지역의 독일계 주민을 대상으로 친위대 대원을 모집했다. 베르거의 노력으로 친위대 대원 숫자는 증가하여 [[무장친위대]]의 조직이 가능하게 되었다. 이를 힘러로부터 높이 평가받은 베르거는 1940년 8월 15일에 [[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]]와 교대해 친위대 본부의 본부장으로 취임했다. 이로 인해 [[무장친위대]]의 인원확충이 더욱 조직화되었는데 전쟁이 격화되자 베르거는 외국인 의용병도 받아들이게 되었다. 이에 [[네덜란드인]], [[프랑스인]], [[덴마크인]], [[노르웨이인]], [[스웨덴인]], [[핀란드인]] 등이 차레로 [[무장친위대]]에 종군했다. [[독소전쟁]]이 개시된 후에 2,400명이던 외국인 의용병의 숫자는 1941년 말에는 12,000명으로 늘었었다. 형무소에서 [[특사]]로 빼내 온 [[범죄자]] 등도 친위대원으로 채용했는데 특히,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 이후 독일군과 무장친위대의 전사자가 크게 늘자 베르거도 인재모집에 열을 올려 모집에 응하지 않으면 반협박조로 <인간사냥>에 나서기도 했다. 이에 나치가 열등민족으로 치부하던 [[슬라브인]]도 친위대 의용병으로 징병하게 되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고틀로프 베르거 대장.jpg|width=100%]]}}} || ||<#ddd>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베르거 || 1943년 1월부터 국회의원으로도 일한 베르거는 1943년 6월 21일 최종적으로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고, 가을부터 힘러의 연락장교가 되어 동방담당 관청의 정치국장으로 일했다. 1944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에 걸쳐 슬로바키아 주둔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후 [[슬로바이카 민족봉기]] 진압의 책임자가 되어 종전까지 국방군 포로수용관리소장으로 일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